수도회원들의 추방

프랑스 대혁명 이후 19세기 프랑스는 큰 변화 속에 정치적 혼란과 권력의 횡포로 교회는 분열되었고 황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10년 프랑스 남쪽 비강(Le Vigan)이란 마을에서 부유하고 신심 깊은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엠마누엘 달종(Emmanuel d’ALzon) 신부(1810~1880)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사회로부터 위협 받고, 인간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 위협당하는 것을 보고 고통을 느꼈다.

1834년 로마에서 사제로 서품된 달종 신부는 1844년에 님(Nîmes)에 있는 성모승천중학교의 교장이 된 시기, 수도회의 필요성을 느끼고 수도회가 새 시대에 부응하는 현대적인 면모를 갖춘 동시에 교회의 전통에 뿌리를 둔 공동체를 창설하기를 원했다. 따라서 우리 자신과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 안에「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도록」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당신의 열정을 다른 형제들과 나누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성모승천 중학교에서 1845년 성탄절에 네 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수련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성모승천수도회의 기틀이 되었다.

달종 신부는 자신의 출신 교구인 님(Nîmes) 교구의 총대리 신부로 38년 동안 일하면서 진리를 추구하고, 가톨릭을 옹호하며 당시 교회의 반대자들에 대항하여 광범위한 복음 전파활동을 했다. 특히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 영적지도, 성지순례, 가톨릭 출판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노력하였다.

1863년 교황 비오 9세로부터 동방교회와의 그리스도교 재 일치를 위해 일해 달라는 선교사명을 받고 즉시 불가리아에 회원들을 파견하고, 1865년 수도회를 도와 일할 성모승천 봉헌자 선교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성모승천수도회는 1880년 달종 신부의 선종 이후, 1884년에  “십자가”(LA Croix)라는 일간신문을 발간하고, 출판사업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고 있으며, 또한 성지순례를 통하여 신자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는데 힘써오고 있다.

1900년 반 성직법으로 인해 프랑스의 수도자들이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이탈리아 등지로 귀양을 가게 되었지만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곳에서 수도회가 점점 더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러시아, 자이레, 콩고, 브라질, 토고, 필리핀, 베트남, 한국 등 29개국에서 1000여명의 수도회원들이 다양성 안에서 활동하는 국제적 공동체를 이루고 성모승천 교육 수녀회, 성모승천 봉헌자 수녀회, 성모승천 작은수녀회, 성모승천 관상수녀회와 함께 다섯 개의 수도회가 한 가족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서로 도우며 하느님의 말씀을 이 세상에 전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