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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인 베로니카
제목 43차 "La Croir" 도보성지순례(거제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
2015.11.14.토요일

아침 6시에도 주변은 아직 컴컴했다.
비 소식이 있다고 우산을 준비하고, 목폴라에 내의까지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7시쯤에 버스가 출발하고, 다함께 성무일도를 바치고 나서 정성껏 준비해 준 간식을 먹었다.
김정근 토마스 형제님의 성지설명에 이어, 백호 요셉 원장신부님의 인사말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공평하게 베푸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걸음마다 주님께서 함께해주신다는 믿음으로 순례를 시작합시다.‘

날이 밝았지만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 때문에, 창밖의 풍경을 감상할 수 없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내게 빈들의 풍경을 보여주기 싫으신가보다.
12월에 들에 눈이 쌓인 멋진 풍경을 보여주고 싶으신가보다 생각했다.
 
 



 


잠을 청하고 나서 깨어보니, 10시 10분 거제에 도착했고 바다가 보였다.
바다에는 배와 어구들이 떠 있었고 특유의 바다 냄새가 풍겼다.
바다 건너 산꼭대기는 물안개 속에 가려져 있어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보여주지는 않았다.


 


 



 

(맨손 체조)


 


 



 


 



 


 



 

 (왕언니 자매님 파이팅!)


 



 


 



 

(큰억새)


 



 


 



 


 



 

(두충나무 길)


 

복음말씀사탕 뽑기와 순례시작 기도를 바치고 맨손체조로 몸을 풀고, 동백나무 비탈길을 따라 천주교 순례 길로 올라갔다.
오른편으로 바다를 끼고 조성된 산길은 호젓했다.
사철나무와 활엽수 드물게 보이는 소나무 산길은 때로는 컴컴해서, 얼핏 다산초당 올라가는 길이 떠올랐다.


 



 


 



 


 



 

3거리 이정표가 보이는 곳에서부터는 포장길이었다.
서이말 등대는 공사 중이어서 주차장이 잠겨있었다.


서이말 등대-‘일본 대마도가 바라보이는 거제도 동쪽 끝자락, 거제도에 천주교 복음을 처음 가져온 윤사우 스타니슬라오와 장남 윤경문 베드로가 움막을 짓고 숨어 살던 외딴 곳이다.
이들은 대마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거제도에 복음을 전파했다.
이곳을 보면 초기 박해를 피해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들러보지는 못했지만, 돌고래 전망대 안내문의 글도 옮겨본다.
돌고래 전망대-(가매 너른 바위)
‘초기 거제도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피난했던 장소중 하나다.
바위 두 개가 있는데 아래는 가마처럼 생겼다고 가마(가매)바위, 위는 넓(너른)다고 넓은 바위이며 교회사적으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장소다.
현재는 돌고래의 이동과 생태를 관측할 수 있는 전망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복음말씀 나누기)


 



 

(아래로 바다와 섬이 보였다)


 

길을 되돌아서 복음사탕말씀나누기 시간을 가졌다.
우리 조는 어찌나 착실하게 말씀나누기를 했는지 다른 조 보다 많이 뒤쳐졌다.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 다시 되돌아오기도 했다.
2시간 30분간 걷기를 마치고 원래의 장소 예구마을에 도착했다.
예구마을은 교우촌으로 주민 중 80%가 교우라고 한다.


 


 



1시에 점심식사를 했다.
버스를 방패삼아 그물을 말리는 곳에서 식탁과 의자를 펴고 소박한 점심을 먹었다.
함께 나누기는 쉽지만, 40명분의 식사를 준비하는 누군가는 힘들었을 것이다.
걷기로 허기가 져서 접시에 많은 밥을 담아서 먹었다.


 


 



 

(그 사이에 날씨는 바다를 좀 더 선명하게 보여줬다.)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를 향해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거제는 전라도의 서남해안의 기후와 비슷한 것인지, 동백나무 유자나무 팔손이 무화과나무도 눈에 띄었다.
윤봉문 성지는 아직 조성 중이었다.
성당은 없고 경당이 있으며 야외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제단이 있었다.
청정한 대나무와 편백나무 그리고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과 작은 폭포도 있었다.
성지의 군데군데는 포도나무를 심어서 줄기를 감아내고 있었다.
곳곳에 정성을 쏟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높이 매달려 계신다, 솔뫼의 주님과도 같이)


 



 



 

(청정한 대나무 숲)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힘들고 지쳐 넘어지고 절망할 때, 주님께서도 세 번이나

넘어지셨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소서!

우리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하소서!)


 



 



 

(편백숲)


 



 

(작은 폭포)


 



로사리오의 길과 십자가의 기도 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백호 요셉 원장신부님 강론-‘연중 제33주일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어려운 환경과 박해 속에서도 구원의 희망과, 하늘나라에 대한 열망 때문에 목숨을 바치며 순교 하셨습니다.
평신도 주일을 지내면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하느님 나라는 사제, 수도자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의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평신도로서 능동적으로 신앙의 삶을 살며, 교회의 한 지체로서 열심히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머리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든 지체들이 함께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한국교회는 평신도들에 의해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역사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 일꾼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평신도로서의 역할을 교회 안에서 잘 수행해 나갈 때,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는 행복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평신도 주일을 맞이해서 사제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거제도의 천주교전래)
‘사학징의’에 나오는 거제도 유배자를 찾아보면 1801년 신유박해 이후에 전라도 사도였던 유항검의 딸 섬이(9세),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의 아들 종근(13세), 황사영의 모친 이윤혜, 이승훈의 동생 치훈이 거제부 노비로 유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수원교구 교회사 연구소 하성래 아우구스티노 교수가, 거제부사 하겸락이 거제도에 부임하여 남긴 문집 ‘사헌유집’을 해제(책의 내용 등에 대한 설명)를 집필하다가 섬이에 대한 기록을 발견했다.
기록에 의하면 거제부에는 71세가 된 유처자가 있었는데 이는 조정에서 금하는 사학(邪學)을 하는 아버지로 인하여 관비가 되어 평생 바느질만 하고 살았다.
그런데 노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으며 그는 명족(名族)의 품위를 지키며 살다가 71세에 세상을 떠나자 당시 거제부사였던 하겸락이 아전을 시켜 양지바른 곳에 무덤을 만들고 ‘71세 유처자지묘’라는 비석을 세우게 했다는 이야기와 시가 남아있다.
기록에 따라 2014년 하성래 교수 김진소신부 허철수신부 서종태 교수가 거제면 내간리 송곡마을 안골에서 마을 어르신의 증언과 안내에 따라 무덤을 발견했다.
그러나 고을에서 훌륭한 분이라는 칭송의 흔적은 있으나 복음을 선포하거나 신앙을 전파한 기록은 없다.
이는 시대가 신앙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는 박해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복자 윤봉문 요셉의 석관묘)


 




(거제의 첫 전교자 윤사우 스타니슬라오)
‘1866년 병인박해는 경기 충청지방 신자들을 문경세제를 중심으로 소백산맥 속에 깊이 가두게 했고, 전라도 지방의 신자들은 덕유산을 넘어 경상도 서북쪽 지방으로 흩어지게 했다.

경북 영일군에 살고 있던 윤사우의 할머니 홍씨는 아들 내외가 병마로 세상을 떠나자, 마음을 달래지 못하던 중에 천주교를 받아들여 세례를 받고 두 손자와 함께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손자들은 윤성우 스테파노와 윤사우 스타니슬라오였다.
성장한 형 윤성우 스테파노는 강 카타리나와 혼인하고, 아우 윤사우 스타니슬라오는 이 막달레나와 혼인했다.
형 윤성우에게 자식이 없자, 동생 윤사우의 자식 윤경문 베드로와 윤봉문 요셉의 아들 중 첫째 윤경문이 윤성우의 양자로 가게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윤씨 가족은 대마도에 가면 신앙의 자유가 있다는 말을 듣고, 대마도로 떠날 계획으로 거제도로 가기로 결정했다.
만약을 대비하여 두 편으로 나누어 먼저 윤성우와 양자 윤경문이 길을 떠났고, 나중에 윤사우와 윤봉문이 길을 떠나서 각자 다른 곳에서 은거생활을 했다.‘

(거제의 첫 교우 진진보)
‘윤사우 스타니슬라오가 형 윤성우 스테파노를 찾아가 은거 생활을 하던 중, 진목정에 살고 있던 진진보라는 사람이 구천동 서당골에 산소가 있어 성묘차 왔다가 낯선 사람들이 사는 것을 발견하고 인사를 나누다가 학식이 있어 말이 통하는 사이가 되자 자기가 사는 진목정으로 초대하게 되었다.
얼마 후 윤사우가 붓대롱 속에 감추어 둔 요리문답서가 진진보에게 발각되어 천주교 신자임이 드러났고, 이를 이해한 진진보는 윤사우에게 교리를 배워 김보록 로베르 신부에게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아 거제도의 첫 신자가 되었다.
진진보는 딸 진순악 아녜스를 윤봉문과 혼인시켰고, 윤경문을 공고지에 사는 주관옥의 딸 또금 아델라와 혼인하도록 주선했다.
이후 두 아들을 거제도에 남긴 윤사우는 다시 전교길에 올라 함안 논실에서 살다가 선종했다.‘


 


 



 

(로사리오의 길)


 



 

(순교자를 위한 기도)

순교자 윤봉문 요셉(1848~1888)
‘거제의 첫 사도로 순교한 윤봉문 요셉은 윤사우 스타니슬라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진진보는 딸 진순악 아녜스를 윤봉문과 혼인시켜 사랑채에 살게 했는데, 이곳은 거제도의 첫 공소가 된다.
윤봉문 요셉은 거제도에 정착하여 신앙인의 모범을 보였고 많은 외교인들을 입교시켰다.
한불수호통상조약(1886년) 이후 천주교 선교사의 활동이 묵인되던 시기에, 로베르 신부 방문 한 달 후 뜻밖에 이 지역에 공식적인 박해가 아닌 사사로운 탄압의 바람이 일었다.

1888년 2월 거제도 진씨 집안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모면하기 위해 천주교 신자를 고발하여 엉뚱하게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회장이었던 윤봉문 요셉은 “죄 없는 교우를 풀어주고 나를 잡아가라.”고 하면서 “부모처자 다 변해도 우리 천주 믿는 마음 변치말자.”는 혈서를 써서 가족에게 주었다.
교우들에게는 “나는 이제 주님 앞으로 간다. 이는 오직 내 고장 거제를 위해서다.”고 하직인사를 하고 자진 체포되어 통영관아로 끌려갔다.
통영에서 1차 심문이 있을 때 혹형을 가하며 배교를 강요했지만 윤봉문은 신앙을 지켰다.
통영관장은 이 사실을 대구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천주교인은 모두 도적과 같으니 진주로 보내서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주까지 끌려갈 때 칡넝쿨로 발목을 얽어서 끌고 갔기 때문에 살이 뭉개지는 고통을 받았다.
진주감영에서도 혹독한 심문이 있었지만 윤봉문은 천주십계와 성교사규를 큰소리로 외치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1888년 4월 1일(양) 진주감영에서“예수님과 같은 고난을 당한다”고 신앙을 고백하고 찬미가를 부르며 당시 나이 37세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주례로 광화문에서 시복되었다.‘
(성지 안내글을 정리하여 옮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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